동학사
- 가을에 물들어 가는 계룡산(鷄龍山)은
무학대사께서 산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 금닭이 알은 품은 형국)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 비룡이 하늘로 오르는 형국) 두 형극을 지녔다 하여 계룡산이라 이름 지었다.
호법신장님이 상주하는 계룡산은 신령한 기운을 품어내고 있는데 드넓은 창천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용맹한 용의 형상을 한 천황봉(상봉)에서 이어지는 연천봉과 삼불봉 능선은 닭 볏을 쓴 용의 형국을 닮았으며 1300년 역사를 지닌 동학사는 산 동북쪽 깊숙한 계곡을 끼고 천황봉과 쌀개봉을 이은 쌀개능선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계람산(鷄藍山)이라고도 불릴 만큼 쪽빛의 맑고 투명한 계곡물이 대웅전 앞으로 동(東)에서 서(西)로 흐르는데 세상에서는 갖추기 힘들다는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선경(仙境)이다. 풍광 빼어난 세진정(洗塵亭)에 앉아 반석 위로 흘러가는 물만 무심히 바라보아도 마음의 티끌이 씻어져 명경(明鏡)처럼 맑아져서 저절로 법(法)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낙엽을 싣고 내려가는 물처럼 세월도 내 삶을 업고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팔만 사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시각각 쉼 없이 펼쳐 보이고 들려주는 장대한 불국토인 계룡산엔 웅장한 삼불봉을 중심으로 첩첩이 이어지는 산봉우리마다 불보살님께서 상주하시어 은선폭포에서 설해지는 청량한 설법부터 골짜기마다 쉼 없이 들리는 불음(佛音)은 자비의 광장설인데 진언(眞言)을 창공에 쓰기 위한 듯 붓끝에 청송을 묻히고 우뚝 솟아있는 문필봉이 석양빛엔 황홀한 금색을 발한다. 이미 마음에 담겨져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가장 친근한 문필봉을 바라보며 실록의 계절을 보내고 어느덧 아름다운 단풍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가을 속에 있다.
내게 단풍이 소중한 이유는 고운 색에만 있지는 않다. 차가운 기운을 싣고 살며시 스쳐 가는 바람결에도 함께 움직여 주고 작은 빗방울에도 아낌없이 내려놓은 멋과 새봄에 다시 솟아날 잎에 자리를 내어주는 순응하는 멋이 애틋함과 설렘을 함께 주기 때문이다.
쌀개능선을 의지한 염화실 앞뜰에 별로 무게가 없는 새벽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바람결에는 찬 기운이 스며들어 있지만 방문을 열어 놓고 앉아 있을 만하다.
늦가을 새벽 비바람을 딱히 마음에 두지 않고 편히 정진할 수 있는 것은 가슴에 새겨진 감사함 때문이리라.
계룡산문을 사십여 년 만에 들어서는 보잘것없은 나를 타향에서 떠돌던 철없는 자식이 늙어서 고향집을 찾아온 것처럼 산중 어른스님과 문중 어른스님들께서 넓은 품으로 반겨주시고 단문(短文)하고 아둔한 나를 동학사승가대학 동문이라 하여 깊은 신뢰와 믿음으로 격려해주시고 뜻을 모아주신 동문스님들 보살핌, 그리고 동학사 대중스님들과 재가불자님들의 은혜 속에서 하루하루 큰 장애 없이 지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인연인가? 위로는 불보살님의 가피와 역대조사스님들의 음덕과 사부대중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참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가을 색이 짙어가고 있다.
논밭에 지어놓은 곡식이 없어 곡간을 채워야 할 번거로움이 없으니 사계절 한가로운 마음으로 마음밭을 잘 가꾸어 불과(佛果)를 거두어 모든 생명과 나누고 싶다.
감사합니다.
성불합시다.
음력 시월 초하루 새벽 염화실에서 경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