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운허 용하스님
- 1913년
환인현에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
- 1915년 2월
봉천성 신빈현 홍묘자에 홍동고등하교를 설립하여 1928년 3월까지 이 학교에서 교포 아동교육에 전념하였다. 또한 1918년 4월 봉천성 통화현 반라배에 배달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 3월까지 역시 교포 아동교육에 전념하였다. 그 뒤 1919년 4월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 기관지인 <한족신보>의 사장을 1920년 2월까지 맡았으며, 1920년 2월 봉천성 관전현 향로구에서 독립운동기관인 光韓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뜻한 바 있어 1921년 5월 30세에 강원도 유점사에 들어가 慶松 銀天스님에게 출가 하였다.
- 1924년
당대의 강백 진응스님에게 四敎를 배우고, 1928년에 개운사에서 석전스님으로부터 大敎를 마쳤다. 예천 龍門寺 嶺南第一講院에서 수학 했으며 石顚 朴韓英스님의 전강을 받았다.
-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불교강원을 설립하여 강사에 취임한 이래 동학사 강원(제 10대)· 해인사 강원 강사를 지내고 봉선사 주지를 지냈다.
- 1946년
양주에 광동중학교를 설립, 1950년 9월까지 교장을 맡았다.
- 1955년
해인사의 강주로 있으면서 최초로 흑판강의를 했으며 이 때 智冠스님, 月雲스님을 배출해 냈다. 해인사 이후에는 통도사 등에서도 講席을 열었다.
- 1959년부터 1965년까지는
광동학원 이사장직을 맡았다.
- 1964년에는
譯經院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 1980년
세수 89세로 입적할 때까지 오로지 역경에만 주력, 역경의 기초를 닦았다. 수행자이자 교육자로서 삶을 살다간 스님이 가장 큰 힘을 쏟은 곳은 역경이었다. 이는 '弘誓深如海 歷劫不思議 : 역경에 대한 서원은 바다처럼 깊어, 억겁토록 생각이 변하거나 논의 하지 않는다.' 라는 친필에서도 알 수 있다. 스님은 특히 楞伽經에 밝아 여러 차례 특강을 했으며 역해를 내기도 했다. 스님이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또 하나의 특기할 것은 1961년에 펴낸 한국불교 초유의 佛敎辭典이다. '이만한 사전은 아직까지 없다.'고 평가받는 이 책은 출간된 후 많은 학자들에게 '교학연구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이렇듯 독립투사·수행자·교육자로서 삶을 살다 간 운허스 님의 생애는 근대 불교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깨인 혼으로 격랑의 시대를 헤치고 항상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기 때문이다. 봉선사 雲霞堂(납자와 단월이 항상 구름같이 모여 福과 慧를 닦는 곳이라는 뜻. 강당채) 건립도 이 책과 관련이 있다. 당시 원고료 50만원 전액(창신동 집 한 채 값이 25만원 정도 할 때)을 봉투도 뜻지 않은 채 봉선사 운하당 건립에 사용하게 했다. 양주 광동중학교 설립 (1946년)도 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방이 된 그 어지러운 시절에 학교 건립 허가를 받기 위해 봉선사에서 중앙청까지 무려 스무 번이나 왕래했다 한다.
- 1965년 2월
학교법인 광동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학교설립 등 여러 일들을 하면서도 스님은 결코 역경작업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 1964년
동국역경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역경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20여 권을 역출했다.대표적 역서로는 『유마힐경』(1961년),『부모은중경』(1961년),『목련경』(1961년),『우란분 경』 (1961년),『승만경』(1962년),『금강명경』(1962년),『40권본화엄경』(1964년),『선가귀감 』(1962년)등이다.
참고
- [운허선사 어문집], [강원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