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초월 동조스님
독립운동가. 이름은 白寅營, 아명은 白學明이며, 족보상 이름은 白道洙이다.일명 最勝, 義洙 라고 하며, 법호는 初月 龜國이다. 1878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출가하여 경학과 수선에 전념하였다. 1916년 명진학교 교장을 지냈고, 3.1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서울 중앙학교를 근거로 하여 항일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인쇄물을 간행하던 한국민단부의 부장을 맡았다. 이 해 7월 항일신문인 <혁신공보> 를 발간, 사장으로 활약하면서 이 신문을 중국 상해 임시정부 및 길림성의 독립군에게 보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천은사, 화엄사 등 각처의 절을 통하여 군자금을 모금 하는 한편 국내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길림의 독립군 및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했다. 이 해 건국 기념일(개천절)인 11월 25일(음력 10월 3일) 보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서울 시내의 각 학교 학생이 참가한 시위 계획 때 선언서를 통해 李堈(이강), 金嘉鎭, 羅昌憲 등과 함 께 대한 민족대표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 무렵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신상완(申尙玩)이 주도 조직한 승려결사인 의용승군에도 관계하여 지원금을 제공했으며, 또 상해임시 정부의 명으로 채권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는데 도중에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듬해 2월 제자 李重珏(이중각)을 통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3·1 독립운동 1주년 기념 시위에 관여하다가 1920년 3월 도쿄에서 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의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뒤부터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활동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그 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으나, 죽은 거북이 한 마리를 방안에 놓고 그와 대화하는 시늉을 하는 등 기인으로서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친일 승려를 규탄하며 독립의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고, 종교의 통일을 위하여 一心敎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 1939년
그가 거처하던 마포포교소의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던 중 봉천행 화물차에다 '대한독 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다시 잡혔다. 그 뒤 마포형무소, 대전형무 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했다. 서울 마포포교당에 주석중 단기 4263 년(1930년) 3월 동학사 강원 제 6대 강주로 초빙되었다. 당시 상승당 대중은 15인, 학인 18 명(대교과 3명, 사교과 5명, 사집과 6명, 사미과 4명) 이었다.
참고
- [강원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