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경봉 용국 스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전북 무주 적상산에서 의병장 盧元變의 부하가 되어 70여 명의 의병을 인솔, 덕유산 등지에서 승병장으로 여러 번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해 인천에서 체포되었으나 탈주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 2년 동안 은거하다가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27세에 건봉사에서 蓮湖화상에게 출가하였다. 당시 조실스님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 이분은 장차 큰스님이 되실 분이니 잘 모시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가 있다.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10년 이상 걸릴 대교과, 수의과를 5년만에 모두 마쳤다 한다. 그 후 금강산 마하연寺에서 禪에 몰두하였다. 이어 유점사, 건봉사 등지에서 경을 공부하다가 1922년 강백이 되어 유점사 불교전문강원의 조실로 2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의 조실로 3년을 지내면서 많은 후학을 지도했다.- 1936년 4월
일본의 불교계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0월 건봉사 주지로 임명되어 승려의 기강 확립과 가람의 수호에 힘썼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연차적으로 소집하는 31본산 주지회 의에서 총독 南次郞의 면전에서 큰 소리로 그의 오만한 태도를 꾸짖었고,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가 운영난으로 매도 직전에 있었을 때 그 부당성과 인재의 양성을 역설하여 학교의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 1945년
광복 후 건봉사 주지로 피선되었으나 북한의 불교탄압으로 월남하여 계룡산 신도안에 은거하던 중, 동학사 주지 송덕윤스님의 청에 따라 1956년 2월 23일 동학사에 비구니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여 제 11대 강주를 지내면서 7년 후인 1963년 제 4회까지 학인을 졸업시켰다.
- 1963년 8월 25일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1969년 7월 25일 세수 85세, 법랍 58년으로 입적하였다. 전강제자로는 비구니 세주묘엄스님과 蕙性스님이 있다.
참고
- [운허선사 어문집], [강원총람]